“(내가) 평양시민 김련희다”

“집(평양)에 빨리 보내달라”

“얘들아 잘 가”

“바래만 주러왔다”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에서 고향의 숨결을 느끼고 싶었다”

“북한 예술단원들이 처음에는 못 알아보다가 이내 나를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북한 예술단원들은 대부분 평양 출신일 텐데 내 고향 평양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저 사람들은 여권도 없이 마음대로 남북을 오가는데 왜 나는 7년이나 고향에 못 돌아가나. 하루하루가 고통”


예술단원들이 거의 동시에 “네”라고 대답

일부는 김씨를 향해 손을 흔들기도 했다.

“김련희씨가 북으로 가고 싶다는데 보내줘야 하는거 아닙니까”


<민간인 통제구역인 남북출입사무소 접근 방법>

도라산 CIQ는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는 통제구역이다.

근무자는 어떻게 통일대교를 지나왔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방법은 이러했다.

민통선 내에 있는 지인을 통해 도라산 CIQ에 갔다. 

하루 전날  김련희는 민통선 내에 있는 지인의 집에 놀러가 출입증을 받고 통일대교를 지나 민통선 안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시간에 맞춰 남북출입사무소로 왔다.


<김련희가 한국에 오게 된 이유>

간 질환을 앓고 있던 김 씨가 스스로 의료비를 해결할 요량으로 남한에서 돈을 벌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북한 정부가 무능하지만 않았다면 김 씨가 탈북과 망명을 생각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김 씨는 이후 잘못 끼워진 첫 단추를 바로 잡고자 했다. 

한국에 도착하기 전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밀수업자에게 이미 여권을 빼앗긴 데다 여권 없이 북한으로 돌아갔을 때 송환된 탈북자라는 누명을 쓰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은 그녀에게 탈북을 종용했다. 

결국, 한국에 도착한 김 씨는 곧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사정하지만, 그녀의 요구는 무시됐으며, 김 씨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탈북에 동의하는 자필 진술서를 제출하고 북한 체제를 부정한다. 

한국 사정에 무척 어두웠던 김 씨는 필사적으로 북한으로 돌아가려 한 만큼 더욱더 갈피를 잡지 못했고 급기야 여권 위조와 간첩 활동이라는 더 큰 문제에 휘말려버렸다. 그 후 김 씨는 체포되어 간첩활동과 여권위조의 혐의로 2년의 실형을 선고받은 뒤 가석방된다. 

또한, 김 씨는 가석방 후 강제 송환되기 위해 간첩인 척했으며, 북한이 그녀에게 간첩활동을 하도록 명령하고, 수집한 자료를 건넨 적이 없다고 자백을 번복했다. 

김 씨가 이런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된 배경에는 남한의 실상에 대한 무지와 북한 정부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한다. 김 씨는 간첩 활동을 하면 남한 정부가 그녀를 북으로 강제 송환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그녀로 인해 북한에 있는 가족이 입을 피해를 매우 걱정했다. 


김 씨는 현재 북송을 간절히 원하고 있지만 그녀의 바람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하다. 안타깝게도 한국 정부는 김 씨의 사연을 알고도 그녀를 북으로 보낼 마음이 없으며 북한 정부 묵묵부답 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0년 이후 탈북자는 약 2만 8천여 명. 남북한 정부는 정치와 이념을 떠나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이들에 접근하려는 노력이 시급하다. 

다음은 뉴스프로가 번역한 뉴욕타임스 기사 전문이다. 

번역 감수:  Terry 기사 바로가기 ☞ http://nyti.ms/1VIUsWz

https://thenewspro.org/2015/09/14/%eb%89%b4%ec%9a%95%ed%83%80%ec%9e%84%ec%8a%a4-%ed%95%9c-%ed%83%88%eb%b6%81%ec%9e%90%ec%9d%98-%ed%9b%84%ed%9a%8c-%eb%b3%b4%eb%8f%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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